THE TRACES OF QU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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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으며 계속 진행하기를 원합니다.

THE
TRACES
OF
QUASI

THE TRACES OF QUASI

001

AN ENCOUNTER 이름 모를 흔적과의 첫 만남

2026
- MON. 05 JAN. 2026
  - "기호의 핵심에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단속적 '출현'이 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특정 '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는 상황에서 솟아나 증식한다."
    (김홍중, 『은둔기계』, 문학동네(2020), 224)
- WED. 08 APR. 2026
  - 기록이라는 행위가 가진 잠재력.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 흘려보내는 것이 좋을까, 간직하는 것이 좋을까.
- SAT. 11 APR. 2026
  -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하는 버릇이 있다.
    한 번씩 책상에 쌓여있는 메모들을 들춰보는데, 언제, 왜 적어놓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FRI. 24 APR. 2026
  - 상반기에 진행한 '버추얼 휴먼' 프로젝트의 장기적 성과에 관한 자료를 기획팀에 제출하고, 자리로 돌아오던 중 평소와 같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흘렀다. 초청 강의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강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았는지, 자리가 부족해 복도에 서서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대규모 데이터에서 적합하지 않은 형태의 찌꺼기들을 제거할 수 있는데 ... "
    "예제를 살펴보면 .... 결측된 데이터가 일부인 경우엔 가장 그럴듯한 값으로 대체할 수 있고... "
    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활용해, 더 매력적인 버추얼 휴먼의 디지털 자아를 생성하는 법에 대한 교육이 있을 거라고, 옆자리 직원이 흘리듯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 SAT. 16 MAY. 2026
  - 지난달부터 사진 동호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저녁 모임에서 '지하창고에서 안 쓰는 물건을 담아두던 상자들을 정리했더니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만큼 먼지가 뽀얗게 쌓인 수동 카메라가 거기 있더라'라는 이야기를 꺼냈고, 눈을 반짝이며 얘기를 듣던 에이미는 한참 동안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돌아오는 주말, 자신과 함께 사진 동호회에 참석할 것을 다짐 받았다는 듯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고 헤어졌다. 물 흐르듯 시작하게 된 동호회 활동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수동 카메라는 생각보다 너무 낡아 사용할 수 없었기에, 휴대폰으로 사진에 대해 배워 나가고 있다. 동호회 활동은 단순했다. 카메라를 다루는 법부터 사진 구도 잡는 법, 현상하는 법등 자유롭게 지식을 나누며, 격 주마다 출사를 나간다. 촬영 장비는 자유롭게 선택한다. 분기별로 그룹을 나눠 주제를 정한 뒤, 각자 찍어온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에 정해진 키워드는 '운동성'이다. 가을이 끝나갈 즈음, 공유회를 갖고 서로의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주제를 갖고 촬영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주제가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으로만 여겨져 무엇을 찍어야 할지 고민된다.
- SUN. 17 MAY. 2026
  - 실험 삼아 찍은 사진들을 보정하던 중, 이상한 모양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진 데이터를 조정하고 확대해보니 긁힌 자국 같기도하고, 먼지가 찍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음에 든 사진이라 그 부분을 지우고 저장해두었다.
- FRI. 16 MAY. 2026
  - 카메라 렌즈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리센터에 맡겼다. 지난달에도 휴대폰을 떨어뜨려 수리를 받았는데, 올해만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 SUN. 07 JUN. 2026
  - 이상한 무늬들은 주로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에서 발견된다. 불꽃놀이 같은 무늬, 구멍 난 고리 무늬, 깃발 같은 무늬 등이 있지만 대부분은 점들이 산개된 모양으로 나타난다. 왜 자꾸 이런 형상이 기록되는 걸까?
- WED. 17 JUN. 2026
  - 키워드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무엇이든 찍어도 되겠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것을 찍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피사체를 정한 듯 보인다. 조바심이 나면서도 계속해서 미루는 까닭은 많은 생각과 조금의 게으름, 그리고 매섭게 내리쬐는 날씨 때문이다.
- MON. 13 JLY. 2026
  - 아침부터 누군가 파일을 잘못 열었는지, 사내 서버가 먹통이 되어 한 시간이나 일이 중단되었다. 수집된 22명의 모션데이터 중 7개의 파일이 손상되어, 지난 열흘 동안 저장한 움직임들이 사라졌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3명을 불러 처음부터 다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움직임들을 기록하고, 추려내야 한다고 안내했다.
    
    맑은 하늘이 점차 흐려졌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고 누군가 말했고, 창밖에는 앰뷸런스가 멈춰 섰다. 3층 서고의 관리자가 쓰러졌다고, 평소에는 잘 움직이지 않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더라고, 또 누군가가 말했다.
    
    데이터 처리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커피라도 한 잔 마실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면에 아주 잠깐, 지나가는 오류처럼 낯익은 무늬가 떴다가 사라졌다.
- TUE. 14 JLY. 2026
  - 기록된 것들의 운동성
    습관적으로 적어둔 글들을 찍어본다. 일기, 메모, 요리법...
- WED. 22 JLY. 2026
  - 발견한 무늬들이 어쩐지 귀여워서 이미지들을 폴더에 따로 모아두었다.
    최근에 찍은 사진들에서는 무늬들이 나타나지 않아 오히려 섭섭한 기분이다.
- TUE. 28 JLY. 2026
  - 퇴근 후, 사진회에서 친해진 한나와 벤과 만나기로 했다. 한나는 인공피부 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연구원으로, 신체의 감각을 인지할 수 있는 인공 신체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벤은 마리오네트 장인으로, 이 도시에서 마지막 남은 인형극단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참석한 모임에서 묘하게 서로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가 맞물리다 보니 어느새 10년 지기처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둘 다 회사가 근처라고 하길래, 저녁이나 함께 먹자며 불렀다. 사진 작업은 잘 되고 있는지, 혹시 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면 함께 고민하자고 할 참이었는데, 이미 마무리 작업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나 성실했다니, 나와 같은 과라고 생각했는데.
- WED. 29 JLY. 2026
  - 저녁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진 공유회의 주제가 어렵다며 한참을 한탄했더니, 벤이 완성된 사진 몇 점을 보여주었다. 그가 운영하는 인형극단의 공연 사진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베토벤 머리의 마리오네트, 캉캉춤을 추는 마리오네트 그리고 긴 줄로 이어진 마리오네트와 그의 손.
- SAT. 08 AUG. 2026
  - 느지막이 일어난 주말의 어느 날, 그 사람에게 받은 사진에도 무늬가 나타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하늘 높이 올라가야지만 발견할 수 있는 나스카 라인처럼, 무늬가 있길 기대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이리저리 사진의 정보를 바꾼다. 어떤 특정한 조건이 필요한 걸까. 촬영과 동시에 새겨지는 걸까. 머리를 긁적였다.
- THU. 17 SEP. 2026
  - 사진 현상 방법.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물과 현상액 1:1, 24시간이상 지난 후 사용하기. 20도, 12분
    30초 동안 천천히 흔들며 정지
    정착
- SAT. 26 SEP. 2026
  - 공유회 첫 번째 주, 이번이 모임 첫 활동이라고 소개한 한 사람이 고요하게 비어있는 농구 코트, 점수 기록지 등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난 주말, 농구시합이 끝난 후, 남아있는 열기의 여운을 촬영한 것이라고, 그녀가 덧붙였다.
- THU. 29 OCT. 2026
  - 가상현실 솔루션 센터에서 발행한 뉴스레터, 《이마고》에 새로운 '버추얼 휴먼, N.14'이 탄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버추얼 휴먼 전문 제작사인 F.U.B(Future utilization of the body)의 14번째 상품이다. 'N.14'의 디테일한 성격, 커뮤니케이션 반응 속도, 움직임 등을 위해 22명의 젊은 남녀가 섭외되었으며, 그들의 무의식적이고 불필요한 움직임들을 지우기 위해서 자체 개발된 메타 휴리스틱 솔루션(MHS)을 사용했다고 전했다. 'N.14'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완벽한 '버추얼 휴먼'의 경험을 선사할 것이며,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고 F.U.B은 전했다.
    [출처] 'Virtual Human, who predicts the future. N.14!', imagomagazine.com
- FRI. 04 DEC. 2026
  -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외투를 두껍게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한 겹, 두 겹, 세 겹. 몸짓이 둔해지고 걸음걸이가 어색해진다. 전날 외투를 세탁해 둔걸 까먹고 엄한 곳에서 찾느라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탔다. 차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있었다. 라디오에서 오늘 밤늦게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소식과 옷을 더 두껍게 챙겨 입으라는 진행자의 말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더 두껍게 입으면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네라고 생각하며, 차창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남긴다. 다행히 제시간에 맞춰 택시에서 내렸고, 차는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QUESTIONS 낯선 모습으로 돌아온 신체의 잔여물

2027
- MON. 25 JAN. 2027
  - "발굴할 때 흙을 흩뿌리는 것처럼 그 사태를 흩뿌려야 한다. 그리고 발굴할 때 땅을 헤집듯이 그 사태를 헤집어야한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김영옥·윤미애·최성만, 길(2007), 182.)
    
    잔여물같기도 한 이 무늬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보인다. 더 많은 이미지를 파헤친다. 더 많은 무늬를 수집한다.
- THU. 18 FAB. 2027
  - 추가로 수집한 패턴들
- FRI. 05 MAR. 2027
  - 사진에 나타난 무늬들을 분류해 보면서, 무늬와 이미지들의 연관성을 관계지어본다.
    무늬가 나타나는 이미지의 특성 하나. 이 무늬는 신체를 좋아한다. 아마도.
    그리고 특성 둘. 비슷한 장면의 이미지에는 항상 비슷한 패턴이 등장한다. 가끔 예상 외의 패턴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 THU. 11 MAR. 2027
  - 여전히 무엇을 찍을지 정하지 못했다. 첫 번째 공유회를 떠올려 보았을때, 모두 자신만의 피사체를 찾아낸 듯 했다.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 TUE. 13 APR. 2027
  - "그는 표면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을 자기 마음속에서 보다 잘 그려 보고 형상화하기 위해 표면을 만진다"
    (존 버거, 『랑데부』, 이은경, 동문선(2002), 100.)
- FRI. 28 MAY. 2027
  - 불 꺼진 어느 상점 앞에서 한참동안 신호가 바뀌는 것을 기다렸다. 커다란 창에 나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어제 새벽까지 분류작업을 계속하다보니 기억 속에 그 잔상이 남아있다. 패턴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창을 가로 지르는 획을 그어본다. 낮은 한 획, 커다란 호를 두 획.
- THU. 03 JUN. 2027
  - "아무튼 아무것도 간단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문제는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이다."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하태완, 민음사(2012), 31.)
- SAT. 10 JLY. 2027
  - 이제까지 모은 패턴들을 조각내기. 비사건의 증거들. 사진의 장면들과 패턴들의 연관성을 가지고 그 의미를 추리해보기. 한가한 주말 오후에 시작하기에 딱 좋은 취미이다.
    그 결과물-
- FRI. 22 JLY. 2027
  - 그림판을 열어 인사를 건네는 낙서들을 그려넣었다.
- WED. 01 SEP. 2027
  - 오전 10시, 오후에 있을 클라이언트 미팅 준비를 시작했다. 전날 제출한 MHS 결괏값에 수정사항이 있어 팀 전체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즘이 되어서야 수정 작업이 마무리되었고, 회의 참석 인원만큼 출력하기만 하면 되었다. 데이터가 전송되기를 기다리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돌리며, 무의식적으로, 전날 무수히 들여다본 패턴들을 출력기의 데이터 전송 화면에 그렸다. 데이터 송출이 완료되었다는 확인 메시지가 뜨며 출력기의 스크린이 어두워졌고, 그 위로 무의식의 손자국들이 드러났다.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본다. 휴대폰에 남겨진 자국들을 바라본다. 수집한 패턴들이 화면에 남은 흔적들을 떠올린다.
- SUN. 12 SEP. 2027
  - 스크린 제스처들의 흔적, 이 흔적들이 왜 이미지에 남겨진 걸까? 기기의 결함이라고 치기에는 발견된 이미지의 출처가 다양했다. 흐릿해서 거의 못 알아볼 뻔했지만, 사진이 아닌 낙서만 그려놓은 이미지에서도 무늬들이 한두 차례 발견됐다. 내가 그려놓은 패턴 위에 중첩되어, 답장을 보내 듯.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모양으로. 두 눈을 비빈다. 뿌옇게 번졌던 화면이 점점 또렷해진다.
- SUN. 12 DEC. 2027
  - 혹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패턴을 직접적으로 검색 창에 올려놓을 수 없었기에 상황과 무늬에 대한 묘사가 최선의 검색 방법이었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찾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은 탓인지 한참을 원하는 정보에 다가가지 못하고, 엉뚱한 자료들만 무수히 마주쳤다.
- TUE. 21 DEC. 2027
  - 다양한 기호에 대해 연구하고 수집해놓은 블로그를 찾았다.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자부터 인류가 외계에 보내는 코스믹 콜(Cosmic Call)까지 어느 정도의 사실과 흥미로운 사담을 늘어놓은 곳이었다. 나의 경험과 유사한 글도 찾아내었는데, 2007년 코스타리카의 한 개발자가 남긴 일화였다. 그는 2005년부터 보행이 힘든 사람들을 위한 외골격 개발연구를 진행한 프로젝트 팀에서, 걷기, 계단 오르기, 무거운 짐 들기 등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기록을 담당하던 연구원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연구에서 어느 순간부터 오차가 조금씩 발생했고, 그는 연구 초반 데이터부터 다시 차근차근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특정 움직임 데이터마다 유사하게 반복되는 오차의 패턴이었다. 그는 이 패턴들이 당시 그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고 적어놓았다. 글 아래 첨부되어 있는 몇 가지 시각화 이미지는 나의 패턴들과 유사했다. 그는 이 패턴들을 '콰지(Quasi)'라 불렀고,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DISAPPEAR 사라진 콰지

2028
- FRI. 11 FAB. 2028
  - 콰지와 대화한 기록들.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 THU. 13 APR. 2028
  - "흐름만이 있다. 끊어진 것은 끊어진 흔적을 남긴 채 이어진다."
    (김홍중, 『은둔기계』, 문학동네(2020), 93)
- SUN. 25 JUN. 2028
  - 수신인지 발신인지 불분명한 이미지들.
- SAT. 08 JLY. 2028
  - 소서. 긴 여름이 시작된다. 한 낮의 기온이 34도까지 올라갔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잠시 나무그늘에 지친 몸을 맡겼다. 개미는 지치지도 않는지 어디론가 끊임없이 줄지어간다. 작은 돌맹이를 들어 그들의 길을 가로막는다. 돌의 끝에 길을 잃은 개미가 뭉쳐진다. 한 마리가 돌 위에 올라 길을 개척한다. 끊어진 길을 찾아낸다. 다시 긴 행렬이 이어진다.
- TUE. 18 JLY. 2028
  - 긴 여름밤 열기를 식혀줄 세찬 비가 내렸다. 우산을 들어도 세차게 닿아오는 빗줄기를 피해 거리의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빗소리는 무한히도 이어졌고,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을 즈음, 발 끝에 빗방울이 닿았다. 5천 미터의 상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동안 빗방울에 쌓인 무게는 나의 신체를 울리기 충분했고, 발을 지나 배꼽, 척추, 어깨 그리고 팔로 뻗어나가 손가락 끝까지 그 무게를 전달했다. 나의 팔은 생각보다 더 멀리 뻗어 있고, 발가락은 생각보다 더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다.
- WED 09 AUG. 2028
  - 지난 3주 동안 두 번의 대화에 성공했다. 인사의 표현같은 경우, 내가 남긴 패턴과 비슷한 형태의 패턴을 보여주었다. 그 다음 대화에서 그려넣은 패턴이 정확하지 않았는지, 혼란스러운 듯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 MON. 21 AUG. 2028
  - 답장을 보내오는 콰지들은 다수인 듯 하다. 그들은 신체와 관련된 것들을 좋아한다.
- TUE. 01 OCT. 2028
  - 마지막 답장을 받은 날로부터 다소의 시간이 지나갔고, 계속해서 그림판 위에 흔적을 남기고, 흐릿한 답을 받는다. 마치 어린아이의 공놀이처럼 그저 패턴을 주고받는다. 대화는 세 번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 SUN. 08 OCT. 2028
  - 그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으면,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형체 없는 바람이 창가에 핀 작은 풀을 흔들고 지나갔다.
- THU. 23 NOV. 2028
  - F.U.B 사의 빌딩 스크린 위로 N.14가 나타났다. 홀로그램 프로젝션을 이용해 만든 '버추얼 휴먼, N.14'의 광고는 마치 그(혹은 그녀, 아니면 그것)가 허공 위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류가 맨 처음 달에 착륙했던 모습처럼, 희미한 중력 속에서 N.14는 매일 3분씩 유유히 떠다니다가 사라졌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N.14의 손바닥을 통과해 바닥으로 착지한다.
A GUIDE BOOK 디지털 세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2036
- MON. 02 JUN. 2036
  - 근황.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코스타리카로 거처를 옮겼다. 집안의 가구들부터 시작해 책상 위에 흩어진 메모들, 읽지 않는 책들,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자료들을 정리도 하면서, 현지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오랜 친구 민의 작업실에서 '디지털 세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가제)'를 집필하고 있다. 11년 전, 우연히 발견한 사진 속 콰지의 흔적들, 낯선 그들과의 만남에서부터 서로 주고받던 대화들을 회상한다.
- WED. 25 JUN. 2036
  - 한차례 집안을 정리하고 나니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요즘은 가보지 못한 새로운 장소들을 찾아내는 것이 즐겁게 느껴져 도시를 탐색하듯 산책하곤 한다. 맞은편 상가, 그 옆에 난 골목을 지나 발견한 조그만 카페, 매일 아침 테라스에서 마주치는 페루 부부의 음식점, 그리고 민의 서점. 낮에는 이곳에 들러 함께 집필을 하고, 밤에는 맥주를 기울인다.
- WED. 24 SEP. 2036
  - 디지털 세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출간
NEWS 최신기사

2037
- SAT. 03 JAN. 2037
  - 가상현실 솔루션 센터는 최근 M.1이 《이마고》의 새로운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고 발표했다. M.1은 F.U.B 사의 기술력과 N시리즈가 쌓아온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탄생한, 이전까지의 '버추얼 휴먼'과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모델로, 인류의 찬란한 미래를 약속한다고 말했다.
    [출처] 'Imago elects new editor in chief', imagomagazine.com